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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넷 (in Netherlands)

#85> 청춘

by 엘트리고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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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May 9, 2016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2006년에 개봉한 영화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가 얼마 전 우연히 그 영화의 소개 영상을 보고 나서 내용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 중에 주인공이 직장상사 (메릴 스트립 역) 에게 실수에 따른 질책을 당하고 주위 동료를 찾아가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러자 그 동료가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고 그냥 칭얼대기만 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패션잡지 회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일하고 있는데 너는 잠시 스쳐가는 곳으로 밖에 여기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녀에게 칭찬을 받기를 원하냐’라는 말합니다. 그 말에 여자 주인공은 생각을 자신의 생각을 고치고 자신의 상사에게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얼마 전 서적 리뷰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20대들에게 사기를 치는 대표적인 책이다라는 서평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아프면 환자지 왜 청춘이냐’라는 반박과 함께 청년세대에게 이유 없는 희생과 불합리에 대한 계속적인 수용만을 강요하는 책이라는 혹평이었습니다. 순간 딱 10년 전에 개봉되었던 이 영화가 2006년 그 당시 20대들에게 주었던 메시지와 오늘날 20대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척이나 다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노력’, ‘도전’이라는 단어들이 20대들에게 영감을 주는 단어였지 오늘날처럼 반감을 주는 단어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실패를 지속하는 20대들에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 봤냐’라는 말에 그들은 최소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반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했었습니다). 오늘날 똑같은 질문을 20대 청년들에게 던진다면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자기 비하적 발언들과 더불어 현실을 모르는 기성세대의 훈계로만 여길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10년 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라는 영화를 본 20대들은 영화상에 나오는 상사의 갑질의 횡포에 맞서서 이겨내는 주인공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의 20대들은 그 갑질에 분노하고 그러함에도 참고 견뎌야 하는 주인공의 삶에 씁쓸해할 것 같습니다. 10년 사이에 왜 이런 생각의 변화가 생겼을까 생각해봅니다. 양극화가 심화돼서 더 이상 계층 간의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푸념 인지 아니면 앞선 세대들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던 여러 가지 경우의 ‘희생’에 대한 반감일 수도 혹은 사회구조가 20대들에게 더 이상 어떤 이상향을 지향하는 '푯대' 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정체된 사회의 문제일까 등등 많은 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20대들에게 노력과 자기희생을 얘기하는 것이 가장 그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단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에 그들이 불쾌해하는 이유일 런지도 모릅니다.

 

군대 시절 유격훈련 중 공포의 PT 체조를 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모두들 힘이 빠져 쉬고 있을 때 당시 대대장이 유유히 강단 쪽으로 올라와 갑자기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를 낭독하면서 젊음에 대해 혼자 찬사를 보내면서 지금 옷이 흙과 땀에 범벅이 된 우리들을 향해 청춘에 대한 특권이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서 있던 곳곳에서 조용히 육두문자가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가끔 그때를 회상해보면 당시 대대장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곤 합니다.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예전 같지 않어~’ 라는 말을 꺼낼 때 그 예전의 기준이 군에서 유격을 받던 ‘20대 초반의 나’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땀과 흙에 범벅이 되어도 지치지 않고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 당시 대대장이 그토록 칭송했던 청춘에 대한 매력을 느끼곤 합니다.

 

만약 내가 지금 군대 유격현장에 있다면 땀에 범벅이 된 그들을 향해 ‘불합리한 현실’을 얘기하기보단 그때 대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럴 수 있다는 젊음’

 

을 찬사 할 것 같은 걸 보니 이제 나이를 먹어가나 봅니다. 청춘이라면 가끔은 무모하고 또 손해 보면서 때로는 도전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이나 혹은 자기희생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멋져 보이니 말입니다.

 

청춘이란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예순 살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네.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늙어가나니
— 사무엘 울만, 청춘 中

 

때로는 계산적이기 보다는 무모하게 내 이상에 따라 행동하고 과감히 손해보고 살아가는 그런 천진난만한 청춘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젊음의 기준을 세월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의 실천으로 정할 수 있는 청춘의 삶을 늘 살아야겠습니다.

 

Monday, May 9, 2016 @ Wageningen,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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