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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다섯 (in Spain)

#135> 공간 (空間)

by 엘트리고 2021.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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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ly 04, 2021

 

거의 1년 만에 바르셀로나에 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올해 5월까지는 지역 봉쇄 상태였고 6월달에는 머뭇거리다가 그냥 시간만 보낸 것 같습니다. 7월 초 오랜만에 리프레쉬나 할 겸 여행을 가볼까 계획했는데 처음 가보는 도시보다는 내게 익숙한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바르셀로나로 향하게 됩니다. 오랜만에 단골 한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당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아주머니 께서 향후 계획에 대해 물어보십니다. 

 

"글쎄요.. 제 분야에서 저를 받아 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겠지요!! 제 분야에선 그나마 독일쪽이 기회가 많이 보이는거 같네요~ 근데 한국에서도 포지션이 생기면 바로 갈 생각입니다"

 

이렇게 제 생각을 말씀 드리니 그 아주머니 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스페인에는 그다지 미련이 없어 보이는 거 같네요!! 저희는 처음에 단기 사업차 이곳에 왔다가 이곳이 너무 좋아서 이곳에 그냥 정착했는데 말이죠"!! 스페인어 공부를 하셔서 스페인 쪽으로 포지션을 알아보시는 건 어때요?"

 

이 말씀을 들으니 '진짜 나는 스페인에 그닥 큰 미련이 없는 거 같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을 하면서 마주하는 스페인의 여러 풍경들이 이뻐서 '스페인 참 좋다'라는 생각은 늘 하지만 내가 일을 하면서 살아갈 곳으로써의 스페인에는 그다지 큰 미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박사과정 동안 거의 박사연구에 투자한 시간만큼 내가 스페인어에 투자를 해서 3년이 지난 지금 어설프게라도 사람들과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스페인 뉴스를 보며 스페인 현재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TV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라면... 지금의 스페인은 지금 보다는 더 큰 존재의 의미로 다가올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내가 이곳에 어느 정도 동화되어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동화되어 내가 살아가는 익숙한 공간이 된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그때 찾아올 아쉬움은 지금 보다는 훨씬 더 클 것 같아 보입니다.

 

대학시절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가서 2년 반 정도를 생활했었습니다. 1년반 동안에는 학위를 받았고 나머지 1년은 대학 연구실에서 일을 했었습니다. 거의 영어를 하지 못하는 상태로 가서 2년 반이 지난 뒤에는 그곳은 내게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즉, 앞에서 예시를 들었던 것처럼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해졌고, 뉴스를 보면서 현재의 미국 상황을 파악할 수도 있었으며, 내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챙겨보며 트렌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였는지 한국으로 귀국해야 되는 시점이 왔을때 무척이나 미련이 남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일하던 대학 연구실에서 대학원 진학이 가능했음에도, 당시 나 자신에 대한 거품이 너무 많아서 그 기회를 무시하고 소위 너무 유명한 다른 대학을 알아보다가 대학원 진학 기회를 얻지 못하고 비자가 만료되어 귀국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였는지 내 선택에 대한 후회와 내게 일상이 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되어 귀국 전날 늘 가던 카페에 앉아 영업이 끝나 문이 닫힐 때까지 글을 쓰던 기억이 납니다. 카페의 영업이 끝나 카페의 불이 하나둘씩 꺼질 때 그 꺼지는 불빛이 마치 내 꿈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더 슬펐던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 귀국해 집으로 가기 위해 탔던 공항 버스 안에서 바라봤던 서울의 밤 풍경이 그렇게 삭막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 일상은 이곳이 아니라 그곳이었는데 하는 생각과 '내 일상이 아니었던 이곳에서 이제 무얼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혼재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달랑 미국에서 2년 반의 시간을 보내 놓고선 무슨 그곳이 이제 나의 일상이었다 라고 오버했을까?'라는 생각을 요즘 종종 합니다. 하지만 20대 시절 그만큼 미국은 2년 반 동안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곳이었고 인생에 있어 최초로 성취감을 느낀 곳이었으며 넓은 세상에서 꿈을 펼쳐보고 싶다고 늘 다짐했던 공간이었기에 그만큼 내 모든 마음을 주었던 공간이었기에 그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공간 (空間) 에 너무 많은 마음을 주었기에 돌려받는 것에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었습니다. 철없던 20대 시절의 일들을 회상해 보며 지금과 비교해 보자면, 지금은 공간에 너무 많은 마음을 줄 이유도 없고 필요성도 못 느낍니다. 이제는 공간보다는 내 업 (業)이 내겐 더 중요합니다. 즉, 어디에서 일하는가가 중요한게 아니고 어떤 일을 하느냐가 이젠 내게 더 중요한 삶의 가치입니다. 과거 공간에 너무 집착해 업을 소홀히 했던 과거의 실수를 생각하면 지금의 이 생각은 더 견고해집니다. 

 

공간에 집착하는 많은 사람들을 목격합니다. 전공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여러 학생들이 유학 관련 조언들을 많이 받습니다. 이 학생들의 마지막 질문과 고민은 늘 하나로 귀결됩니다.

 

"졸업 후 현지취업은 가능할까요? 현지 취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굳이 유학을 갈 필요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것은 공간 (空間) 을 업 (業) 보다 중시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선진국에서 내 분야의 트렌드를 배워서 이런 전문 영역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는 그 공간에 머물고 싶다가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공간을 우선시하면 업은 따라오지 않습니다. 반면 업을 우선시 하면 공간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주위 많은 유학생들이 졸업 후 현지에 남기 위해 자기 분야와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며 아무런 색채 없이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반면 자기 분야를 우선시하며 살아가는 한 선배는 현재 한국과 외국을 오가면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자기 브랜드를 높여 나가고 있습니다. 

 

각자 삶의 가치가 다르기에 각자의 가치관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나 개인적으로는 공간보다는 업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업을 통해 공간은 따라올 수 있으나 공간을 통해 업은 자동적으로 따라올 수는 없습니다. 내 업에 집중하고 그 업을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자기 만의 공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Sunday, July 04, 2021 @ Barcelona,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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