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넷 (in Netherlands)

#82> 퇴수(退修)

엘트리고 2020. 8. 4.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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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February 28, 2016

 

한 세대를 풍미했던 운동선수나 유명인이 시간이 지나 대중의 뇌리 속에서 잊히고 평범한 일반인이 되어 TV 속에 등장하는 장면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들의 젊은 시절 혹은 전성기 때 세상을 호령할 것만 같았던 그 에너지는 이제 시간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 아래 삶의 연륜으로 바뀌어 평범함이라는 일상을 인정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주는 듯합니다.

 

TV 속에 과거의 한 유명인이 등장합니다. 누군가와 같이 거리를 걸으며 지난날을 회상합니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걸어도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과거 그는 이렇게 거리를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늘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고 늘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였기에 ‘잊혀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섭섭하지 않으세요?’ 같이 거리를 걷던 리포터가 그에게 물어봅니다.

 

‘솔직히 섭섭할 때가 많았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것이 자연의 순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을 혹여나 만나면 그 한 사람이 무척이나 귀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대답 속에 무척이나 삶의 연륜과 성찰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둘이 향한 곳은 과거 그가 슈퍼스타였던 그 분야에 현재의 슈퍼스타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 짧은 시간 동안 현재의 슈퍼스타와 짧은 담화를 나누고 헤어집니다. 그 둘이 식당을 나오는 그 순간에도 그 식당 안에는 그 슈퍼스타와 사진을 찍기 위해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40년 전에는 이 풍경이 그의 일상을 모습이었기에 그는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에 잠기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그는 물러남을 아는 현명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시간이 흘러 자기 세대가 중심에서 멀어졌을 때 다음 세대를 위한 물러남의 미덕을 갖추지 못하면 시간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게 되는 부자연스러움을 가져오게 될 듯합니다. 얼마 전 국내 한 유명기업에서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을 때 근본적인 문제는 창업주가 90세가 넘었어도 경영권을 내려놓지 않고 본인이 쥐고만 있었기에 후계구도의 불확실성을 야기해 일어난 문제라는 비판기사를 본 기억이 납니다.

 

과거 대학시절 기독동아리 모임에서 간사님 한 분의 말씀이 문득 기억납니다. 그분은 그 대학에서 처음 그 기독동아리를 만드셨고 수십 년간 그 동아리를 키워오신 분이 셨습니다. 그분의 노력으로 인해 그 동아리는 300명이 넘는 큰 모임으로 성장했는데 어느 시점에서 그분은 다른 업무로 인해 그 동아리 간사 역할을 그만두게 되셨다고 합니다. 당시 강연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이 그것을 그만두고 나서도 그 동아리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 8년이 걸리셨다고 합니다. 자기와 이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그 동아리에 계속해서 참견하고 간섭하며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애쓰는 자기 모습을 보고 순간 ‘아~ 내가 이 모임을 내 소유로 생각하고 있구나’라고 깨닫고 그때부터 물러남을 실천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이룬 것, 내가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이룩해낸 것은 다 내 것 같아 보이며 내가 늘 그 소유를 인정받아야 하며, 타인이 늘 나의 존재를 인식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지만 과거의 슈퍼스타에 대해 알아보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대중들처럼 그 관심은 무척이나 냉정함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물러남의 자세를 가지지 못할 때 그 냉정함에 쓰라린 상처만을 안고 살아갈 것이며 물러남을 실천할 때 비로소 자연의 법칙 아래 여유와 미소를 가질 수 있을 듯합니다.

 

과거 잘 나갔던 정치인 한 명이 순간의 선택을 잘못해서 정치생명이 거의 밑바닥으로 떨어져 정치를 그만두고 글을 쓰는데 그 제목이 ‘퇴수(退修) 일기’였습니다. 퇴수(退修), 즉 물러나서(퇴, 退) 닦고 익히다(수, 修)라는 것입니다. 물러남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 같아 보입니다.

 

내가 지금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 혹은 그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시간이 지났을 때의 퇴수(退修)를 미리 연습해야겠습니다. 모든 것이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내 소유물이 아니기에 내 노력이 더해지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퇴수(退修)의 길을 열어 나가야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진정 물러남이 필요한 시간이 왔을 때 퇴수(退修)의 실천으로 닦아둔 새로운 가치들로 나만의 진정한 슈퍼스타가 되어야겠습니다.

 

Sunday, February 28, 2016 @ Wageningen,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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