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트리고 2020. 8. 4.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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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19, 2016

 

이번 주 점심시간 중 학교 내에 작은 공연이 있어 관람하러 갔습니다. 공연자들이 현대무용 같은 춤을 추면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행위예술가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30분 동안 이해해 보려고 무척이나 애썼음에도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그 자리를 나오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관객들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했음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만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관심을 가지고 그 내재적 의미를 찾았겠으나 저 같은 예술 감각이 바닥인 사람은 무척이나 무료한 시간으로 밖에 다가오지 않는 듯합니다.

 

문득 소통이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언어로 관객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했고 누군가는 그들과 소통을 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러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소통의 실패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간극을 나타 내는 듯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다 했으니 그 실패의 책임을 청자에게 돌릴 수도 있고 청자는 화자의 말이 너무 난해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둘 다 그 간극을 좁히고자 서로 노력하지 않았다면 누구에게도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 대학 학부시절 교수님 한분이 생각납니다. 은퇴를 곧 앞두셨던 그 교수님의 수업방식이 무척이나 독특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는 파워포인트로 수업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던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20세기 말이어서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수업광경이 펼쳐집니다. 그 교수님이 “자~ 내가 이 문장을 불러 줄 테니깐 받아 적으세요” 라며 긴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모두들 그 문장을 받아 적어 내려가기에 바빠집니다. 혹여나 특정 단어를 놓친 몇몇 학생들은 ‘다시 한번 불러주세요’라고 요청하면 그 교수님은 다시 천천히 그 문장 읽기를 반복합니다. 전체 수업의 2/3 정도가 이런 수업방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이 과목의 정체성이 어느 순간 받아쓰기 수업으로 바뀌어 가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파워포인트가 없던 시절 아마 그 교수님은 과거 수십 년간 본인이 해 오셨던 그런 방식으로 학문적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반면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런 방식이 무척이나 일방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 수업에서 교수님과 학생 사이에서 그 어떠한 소통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광경은 소통의 사전적 의미,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전 누군가에게 통계학의 특정 개념을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이것은 랜덤 화가 적용되는 경우야~” 라며 얘기를 하고 계속 설명을 이어갈때 그 사람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이야기 하며 질문을 해서 다시 설명을 하려고 하니 그 사람이 ‘자기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라며 자기가 궁금해 하는 것은 노트에 그리기 시작합니다. 나도 질세랴 다시 노트에 적어가며 얘기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그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은 ‘랜덤화’ 였습니다. 나는 랜덤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그 사람은 모르고 있습니다. 랜덤화를 아는 사람이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아무리 설명을 한들 그 두 사이에서 소통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위의 예처럼 자신의 방식을 계속 고집하는 경우 혹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 소통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예전 우스갯소리로 남자들이 ‘여자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남녀 사이의 소통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얘기 같아 보입니다. 남여 사이에서 혹은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나만의 소통방식을 고집하는 경우 관계의 발전이 힘든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결국 소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 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모르면 ‘모르겠다’,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쁘다’ 등등 그냥 편안하게 내 감정을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솔직함이 타인과 나의 소통방식 및 언어를 바꿀 수 있는 출발점 같아 보입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라는 책의 첫 문구는 ‘왜 우리는 쿨(cool) 함에 목숨 거는가’로 기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어떠한 외부 자극에도 나는 괜찮다’라고 표현하는 그런 쿨함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 감정에 솔직해져야겠습니다. 그리고 타인과 나의 소통을 막고 있는 내 안의 장애물들을 하나둘씩 걷어 내야 겠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같은 언어로 타인과 쉽게 소통할 수 있는 ‘말이 잘 통하는 사람’ 이 되어야겠습니다.

 

Friday, February 19, 2016 @ Wageningen,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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