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넷 (in Netherlands)

#41> 트라우마

엘트리고 2020. 7. 3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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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February 26, 2015

 

초등학교 시절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게 되면 수많은 다른 학생들이 달려와서 문 위로 올라가 그 아이를 놀려대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행동들이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행해졌고 가끔은 나도 가해자가 되고 또 가끔은 피해자의 입장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한 아이가 배가 아파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야~ OO x싼다~” 라는 함성과 함께 화장실 주변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화장실 문을 차고 더 악랄한 녀석은 화장실 문위로 올라와 그 아이를 대놓고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당시 그 광경이 무척이나 재미있을 수 있지만 피해자의 입장에 섰을 때 그 곤혹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부터 배가 아프면 쉬는 시간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손들고 화장실을 다녀오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이런 어처구니 없는 광경은 사라졌습니다. 배가 아픈 학생은 당당하게 화장실로 들어갔고 그 누구도 그걸 가지고 놀리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쉬는 시간에 큰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게 다가왔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 10대시절을 마무리하고 대학생을 거쳐 직장인이 된 후 멋진 양복을 입고 본사에 가서 임원에게 보고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배가 아파 회사 화장실을 갔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니 나이 지긋하신 부장님 한분이 손을 씻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화장실을 나왔습니다. 이유는 뭐랄까…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화장실에 누군가 있으면 그 화장실 문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쿵쾅거리며 두들겨질 거 같은 느낌이랄까요?

 

초등학교 시절 하나의 사건이 나이가 들어 양복을 입은 30대 청년의 삶에 아직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젠가 부터 배가 아파 화장실을 가도 거기에 누가 있으면 늘 그냥 화장실에서 나왔습니다.

 

트라우마: 사고로 인한 외상이나 정신적인 충격때문에 사고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불안해지는 것

 

초등학교 시절 그 사건 하나가 나에겐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나 봅니다. 얼마전 TV에서 본 강연에서 강사가 말하기를 한 실험에서 ‘5분 동안 어떤 생각을 해도 좋습니다. 단 흰곰만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더니 5분 뒤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흰곰만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강사가 말하기를 단 하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침투해 들어오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그 생각만 남게 한다고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을 차지하고 있는 트라우마 혹은 부정적 생각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린시절 발음이 부정확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내 번호의 날짜가 돌아오는 날에는 학교가 무척이나 가기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그 날짜에 맞춰 학생 번호를 부르며 책을 읽게 시키곤 하셨는데 제가 책을 읽게 되면 주위의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는 게 무척이나 싫었습니다. 그 시절 나는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낮은 자존감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 트라우마가 지금도 내 삶에 박혀 있는지 ‘거절당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한번 거절당한 것에 다시 시도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한번 거절당하면 다음에 다시 시도해 보면 되는데 뭔가 나를 거절한 이유는 나를 무척이나 싫어해서 그럴 것이라는 어릴 적 낮은 자존감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내 삶 구석구석에 박혀있나 봅니다.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는 말에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 사람들은 투정 어린 말투로 내가 다독여 주길 바랬는지 모르는데 난 그 거절당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지 늘 알겠다는 말과 함께 너무 쉽게 관계성을 끊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누군가가 당신은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라는 말에 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하며 답변했습니다. 겸손일 수도 있겠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겸손이라기보다는 낮은 자존감에 기반한 반응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내 삶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이런 트라우마들이 가끔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내가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간과한 체 과거라는 사건에만 묶여 있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화장실에서 누군가 손을 씻고 있으면 화장실을 나왔다 나중에 다시 들어가곤 합니다. 제안서든 요청사항이든 뭔가 보냈을때 ‘미안합니다’라는 문장을 보면 쉽 사래 포기합니다. 당신 참 멋진 선택을 하셨네요 라는 말에 제정신이 아닌 거죠 라며 나를 비하하는 말투를 내뱉곤 합니다. 순간 이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이 부정적 생각을 없애지 않고서는 나는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화장실을 가더라도 당당하게 들어가고 거절당하더라도 내 부족함을 찾고 채우기를 노력하고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나 역시 나를 좀 더 칭찬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내 삶에 박혀있는 트라우마를 하나씩 빼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늘 긍정적인 생각만 가득한 유쾌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Thursday, February 26, 2015 @ Wageningen,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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