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북리뷰]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Tuesday, June 26, 2012
분리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책에서 예시한 것처럼 분리됨이라는 것이 결국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분리된 삶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런 분리됨은 개개인에게 나타나지만, 곧 그것은 다른 이들의 문제로 확산된다고 합니다. 즉, 자기 역할에 대한 자포자기 및 자아의 파괴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사들이 지위 뒤에 숨어 건성건성 가르치면 그것은 곧 학생의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역활을 무시하고 살아가게 되면 그 역할과 연결돼 있는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겠지요?
결국 역활(role) 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남자 친구로서 자신의 여자 친구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체 솔직하지 못한 모습만 지속되면 그 연인 관계는 영혼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더 발전돼서 남편이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면 그 가정 역시 파괴로 이어집니다. 공무원이 매너리즘으로 업무를 취급하면 그 업무와 관련된 많은 기업 안에 사람들 역시 비논리적인 공문에 한탄하며 하루를 보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파괴는 물리적인 어떤 깨어짐(break) 이 아니기에 쉽게 발견되지는 않는 것같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면서 술과 약물, 일과 쇼핑, 분별없는 대중매체 같은 마취제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 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왜 자아의 분리됨이 발생되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책은 우리가 분리된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 때문이며 공적인 역할의 세계와 감춰진 영혼의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나름대로 분리된 삶을 만들어감으로써 그 위협에 대처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소위 어른이 되면서 무대 위의 나를 연극하곤 합니다. 이는 사회성 혹은 사교성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우리의 삶을 매일 압박하곤 합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라는 책을 보면 오늘날 우리는 '쿨함'이라는 것에 열광한다고 합니다. 결국 쿨함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타인에게 비치는 나의 모습에 대한 지속적인 반작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적인 역할의 세계와 감춰진 영혼의 세계를 오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분리된 삶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공적인 역할은 내가 관객에게 보이는 무대이며 감춰진 영혼의 세계는 무대 뒤 혼자의 모습입니다.
대학생 시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무척이나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 나의 공적인 역할은 팀의 리더이자 교회 구성원의 일부로써 내게 주어진 공적인 역할이 무척이나 명확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사교성 있게 새로운 사람들을 챙기고 신의 내게 부여한 소명을 발견하고 비전을 향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으며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활동적이면서 선한 말로 사람들을 권면하는 모습도 가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명확한 것은 내 성향은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며 조직 안에서 여럿이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나는 주말과 평일의 삶이 분리되는 삶을 수년간 살아왔었습니다. 무대 앞에 보이는 나의 공적인 역할에서의 활동적인 모습과 무대 밖의 내 영혼의 세계에서 정적인 모습 간의 괴리감이 무척이나 컸던 것 같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면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였던가 합니다. 결국 무대 위에서 쿨하고 활동적인 나를 보여주고 싶었고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그 조직 안에서 나의 적극적인 모습을 통해 나의 우월감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교회만큼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고 또 인정받을 수 있는 장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펼치는 연극 무대 같은 곳이지요 (교회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꼈던 분리된 삶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시는 분들 오해 없으셨으면 해요)
분리된 삶은 병든 삶이고 늘 증후군이 따라온다고 합니다. 이중적 자아 같은 내 모습에 인간관계도 분리되며 사용하는 언어도 내가 속한 커뮤니티에 따라 분리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런 분리됨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의 역할(role)의 혼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뫼비우스 띠야 말로 이런 분리됨을 해결하는 핵심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책은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무엇 이든 그것이 계속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우리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계속 안으로 흘러들어와 우리의 삶을 형성하는데 일조한다. 뫼비우스 띠는 인생 그 자체와 같다. 여기에서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실재 가 존재할 따름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실재... 결국 분리됨은 다시 하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대 위의 나와 무대 밖의 내가 같아지는 그런 하나의 실재 같은 모습 말입니다. 책에서 말하는 우울증의 정의가 우리가 바라는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상황, 삶의 길이 숲 속으로 사라지는 듯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진화적 반응이라면 갈라진 그 두 길을 다시 하나로 합쳐야 하듯 우리 안에 분리되어 나의 영혼을 갉아먹는 그 이중적 자아를 하나의 실존으로 통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삶 가운데 분리된 모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 가족들 안에서의 나의 모습,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존재하는 나의 모습 등 "이 다양한 모습들이 과연 다 통합된 하나의 실재인가?" 라는 질문에 아닐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어떤 무대에서는 나는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피폐된 사람이고 다른 무대에서는 난 멋진 나를 연극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가 생각납니다.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하나의 실재를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책은 말합니다.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함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고 말입니다. 결국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부분을 인정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무대 밖의 나의 못난 부분도 결국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감싸고 인정해야만 한다는 말 같습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드라마에서 각자 작은 한 부분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