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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평등

엘트리고 2020. 7. 2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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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December 5, 2008

 

오늘 우연히 두 가지 사건을 접하고 갑자기 인간의 평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 하나

학원에 일하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화통화 중인 체 버스를 타시는 한 아주머니를 보게 됩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는 듯 전화로 언성을 높이며 내 뒷자리에 앉아 계속 통화를 하고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아마 어떤 공무원과 통화 중인 것 같습니다. 계속 공무원의 자질에 대해 논하고 사과를 요구합니다. 아마 이 공무원이 어떤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그 공무원이 아마 매너리즘에 빠져 자기 업무를 소홀히 한 모양이구나` 혼자 생각하며 다시 차장 밖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하지만 계속 들려오는 전화 내용을 들어보니 뭔가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아마 이 아주머니는 국세청 공무원의 실수로 종부세 환급에 대해 손해를 본 모양입니다. 그 아주머니의 논리 정연한 질책에 그 공무원 역시 쩔쩔매는 것 같습니다.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공무원의 자질에서부터 시작해 개인의 손해, 권리침해, 소송 등 온갖 잡다한 우리가 정치 시간에 배웠을법한 내용이 총동원됩니다. '화를 내도 참 이렇게 유식하게 화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 아주머니가 하신 한마디에 정말 우리가 정치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단지 텍스트(text)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내가 부자라면 이러지도 않아요, 난 서민입니다. 누가 남의돈 그저 받겠다는 것도 아니고 돌려주겠다고 한돈 다시 받겠다는데 이걸 못 받게 되니 속상하지요” 

 

글쎄요 대한민국에서 종부세 납부한 사람을 단순 서민이라 한다면... 순간 쓴웃음이 지어집니다.

 

# 둘

늦은 밤 학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계단을 오릅니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몸을 웅크리고 추위를 맞이합니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 한 아주머니가 추위에 발을 구르시며 찹쌀떡을 팔고 계십니다. 10개에 천 원이라고 하십니다.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생각에도 없던 찹쌀떡을 삽니다. 추위에 떠시는 아주머니가 고맙다고 인사를 하십니다. 이 아주머니는 오늘 하루 추위에 떠시며 천 원짜리 찹쌀떡을 얼마나 파셨을까요?

 

평등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얼마 전 존 애덤스(John Adams)라는 드라마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영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미국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왕이 지배하는 국가가 아닌 국가 구성원 개개인의 참여에 따른 공화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독립선언문 첫 장에 먼저 나와있는 것 또한 평등이라는 개념입니다.

 

all men are created equal

 

250년 전 그들이 추구했던 것 이 양도될 수 없는 가치와 그들이 걸었던 발자취를 존 애덤스(John Adams)라는 드라마를 통해 다시 발견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평등이라는 개념은 모두 다 다 잘 사는 유토피아를 꿈꾼 것은 아닐 것입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그 배경이 아닌 각자의 노력에 의해 그에 합당한 성취를 이루는 것, 그에 걸맞은 보상을 받는 것, 그것이 그들이 추구했던 Equality는 바로 이런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오늘날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 원동력은 아니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얼마 전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신을 미국의 정신의 산물이라고 얘기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케냐에서 태어난 한 가난했던 학생, 그 학생은 공부가 하고 싶어 미국의 대학에 수없이 편지를 썼고 한 대학에서 그에게 장학금과 함께 입학을 허락했다는 얘기, 그 케냐의 젊은 학생은 미국에서 백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입니다. 오바마는 미국을 기회의 땅, 가능성의 땅이라 말합니다. 가난했던 케냐 흑인 유학생의 아들이었던 자신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었다 말합니다. 이 모든 것 역시 미국의 독립정신인 평등에 기초한 것이겠지요.

 

all men are created equal

 

그래서 모두는 능력만 된다면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도 주어집니다. 미국에 있을 적 이런 평등에 대해 오해한 적도 있었습니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에 대한 오해겠지요. 당시 한 수업에서 유일한 유학생이었던 나로선 당연히 그에 걸맞은 혜택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온 성적표는 참담하더군요. 모든 학생은 수업받을 기회도 시험칠 기회도 더 나가 교수를 직접 찾아가 모르는 부분을 물어볼 기회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통해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하겠지요. 이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데 1년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역시 이 결과의 평등에는 냉정한 것 같습니다. 대학 학창 시절 공부에는 뒷전이던 학생들이 졸업 후에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과 같은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이 사회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노력한 만큼 가져가라는 단순한 진리 앞에 평등이라는 개념은 확고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평등의 잣대가 정당한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결과의 평등에 대해 확고히 말하기 전 먼저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는지요. 종부세를 위헌이라고 말하기 전, 부자가 죄인이냐고 반문하기 전, 먼저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의 평등을 누렸는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는지, 평등한 기회 앞에 더 노력 한자가 더 많은 보상을 누린다면 그 사회는 더 발전하겠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평등한 사회인지 반문해 봅니다.

 

6억 이상 집을 소유해 더 많은 세금은 냈던 버스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자신이 서민이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늦은 밤 지하철역 앞에서 만난 아주머니는 추위에 발을 구르시며 천 원짜리 찹쌀떡을 파십니다. 그리고 고맙다 인사만 하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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