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셋 (in USA)

#10> 행복한 야채장수

엘트리고 2020. 7. 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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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February 27, 2008

 

얼마 전에 학교 실험실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사실 그만두었다기보다는 잘렸다는 표현이 나을 듯합니다. 같이 일하던 Podoc 이 어느 날 연구비가 바닥났다며 같이 일할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이 랩에서 5월까지 일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계획했었었는데 갑자기 바뀐 상황에 며칠간 많이 고민한 듯합니다. 다시 여러 군데 랩을 알아보기도 하고 그냥 확 귀국해버릴까 하며 비행기표도 알아보고 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해줄 대학원 합격 여부도 이리저리 알아보고, 근데 한 군데는 이미 떨어졌더군요. 그리고 대부분의 랩은 짧은 2~3 달 일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5월부터 장기간 같이 일할수 있는 사람을 찾더군요. 글쎄요~ 막다른 골목 끝자락에서 뒤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막힌 담을 훌쩍 넘을 수도 없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저 그 자리에 서있기만 한 체 며칠을 보냈습니다.

 

아시안 마켓에서 같이 일할 사람을 찾더군요. 이것저것 물건을 정리하고 가격을 붙이고 매일 오는 야채를 포장하는 그런 단순 노동입니다.

 

“난 이곳 주립대 학위도 있는데”, “난 소위 말하는 미국 대학 Ph.D 지원자잖아”, “나이 서른에 아직 그런 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분명 나를 한심하게 볼 텐데”, “폼이 안나잖아?” 등등 수많은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어느 순간 나의 자존심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아져 좀처럼 내려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난 늘 자존심 버리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건 내 삶 구석구석을 차지하고 있군요. 예전 자존심 (pride)과 자부심 (self esteem)을 혼동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것일 줄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근데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그건 내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부심을 버리는 것이더군요. 그리고 내 안에 자존심은 늘 삶 가장 한가운데 깊숙이 차지하고 있더군요. 내가 버려야 할 자존심은 무엇일까 고민해 봅니다.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일”,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일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 ,”내 경력과 내가 이룬 성과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내 상황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 아닐런지요. 그리고 “나는 멋진 사람이다”라는 나 자신에 대한 존경도 잊지 않는 것이겠지요.

 

예전 초등학교 시절 국회의원 선거 때가 기억납니다. 제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국회의원 선거 유세가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불암 아저씨가 온다는 소식에 아마 전교생이 다 그 유세장에 모였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들은 몇 명 보이지도 않고 다 초등학생들이 앞자리를 차지해 단지 최불암 아저씨를 보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뜨거웠던 봄날 학교 운동장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얼마나 민망했을까요? 선거유세하겠다고 왔는데 유권자는 한 명도 안 보이고 어린 초등학생만 앉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 국회의원 후보는 일일이 나를 포함한 초등학생들과 악수를 하더군요. 민망한 기색도 없이 허리를 숙이고 어린 우리들과 악수를 나누던 그 국회의원 후보. 그날 당장 집에 달려가 부모님께 최불암을 봤다는 얘기와 그 국회의원 후보와 악수했다는 얘기를 했죠. 그리고 부모님께 그 사람한테 투표하라고 졸라대던 기억이 납니다. 신기한 건 나중에 그 국회의원 후보가 당선이 되더군요. 아마도 저 같은 얘들이 많았겠죠?

낮아짐은 자존심을 버리는 첫출발 단계인 것 같습니다.

만일 그 국회의원 후보가 자신의 상황이 민망해서 행여나 학생들에게 핀잔이나 주었다면 멋모르고 그저 최불암을 보는 것이 좋은 학생들의 손을 뿌리치고 그저 성급히 사라졌더라면 그 사람은 과연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에 아시안 마켓에 전화를 걸어 일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어제 처음으로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밤 11시에 시카고에서부터 온 물건을 나르고 야채를 다듬고 가격을 붙이고 그렇게 새벽 2시 30분까지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밖 풍경은 그 전 내가 볼 수 없었던 어떤 풍경들을 보여줍니다. 텅 빈 거리와 그 전에는 미쳐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 또한 생각하게 하니 참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몇 시간 자고 오늘 아침 일찍 다시 나와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하면서 피곤하지만 나는 지금 조금이나마 “삶”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참 행복한 야채장수입니다.

 

Wednesday, February 27, 2008 @ Ames,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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